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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헨만 Ein Kinderspiel (기악구체음악, 특수주법 가이드)

by 진헤 2026. 4. 23.

 

제가 처음 라헨만(Helmut Lachenmann)의 음악을 접한 것은 그의 관현악곡이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현을 일부러 끊어버리거나, 악기로 전통적인 음 대신 물리적인 소음을 만들어내는 방식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음악이라기보다 하나의 소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작품은 그의 피아노 모음곡 Ein Kinderspiel입니다. 총 7개의 짧은 곡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제목이 ‘어린이 놀이(Child’s Play)’이지만, 결코 어린이를 위한 곡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현대음악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이러한 비전통적인 기법들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실제로 악보에는 음표보다 기호가 더 많고, 서문만 해도 한 페이지를 훌쩍 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전통적인 클래식 미학과는 정반대 지점에 있다고 평가받는 라헨만의 작품을 분석하고, 제가 직접 연습하며 느꼈던 실질적인 경험들을 함께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라헨만이 서문에서 직접 설명한 기보법과 연주법을 사진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라헨만의 서문 기보법과 연주법
라헨만의 서문 기보법과 연주법

 

기악구체음악

 

라헨만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직접 만든 개념인 기악구체음악(Musique concrète instrumentale)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이 개념은 피아노나 현악기 같은 전통 악기를 전자장비 없이 사용하되, 기존의 연주법 대신 악기의 물리적 특성을 극한까지 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작곡 방식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피아노는 더 이상 단순히 “음표를 연주하는 악기”가 아니라, 가능한 모든 소리 현상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직접 이런 기법들을 연습해보면서, 이것이 단순히 “이상하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소리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를 들어 제6곡 Glockenturm (“종탑”)에서는 연주자가 건반을 매우 짧고 강하게 스타카토로 친 뒤, 같은 건반을 다시 소리 없이 눌러야 합니다. 이 기법은 그랜드 피아노의 *이중이탈장치(double escapement)*를 활용합니다.

 

이중이탈장치 1821 Sébastien Érard 발명한 메커니즘으로, 하나의 건반을 빠르게 반복 타건할 있게 해주는 장치입니다. 라헨만은 장치의 일반적인 목적을 역이용합니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건반을 다시 조용히 눌러 잔향을 연장시키고, 특유의 lingering sonority(잔존 울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Ein Kinderspiel〉은 1980년에 작곡된 7개의 소품 모음입니다. 라헨만이 직접 각 곡에 붙인 제목을 보면 그의 의도가 느껴집니다.

  • 제1곡 Hänschen klein (꼬마 한스): 독일 동요 리듬을 인용, 피아노 88건반을 최고음에서 최저음까지 하행
  • 제2곡 Wolken im eisigen Mondlicht (얼음같이 찬 달빛 속의 구름): 최고음역 8개 건반만 사용, 독특한 페달 기법
  • 제3곡 Akiko (아키코): 백건과 흑건의 극단적 대비, 소스테누토 페달 유무에 따른 a·b 버전 분리
  • 제4곡 Falscher Chinese (가짜 중국인): 오른손 백건, 왼손 흑건, 부점 리듬 효과
  • 제5곡 Filter-Schaukel (필터 그네): 클러스터 고정 요소와 잔존 음향
  • 제6곡 Glockenturm (종탑): 3성부 구조와 애프터터치 기법
  • 제7곡 Schattentanz (그림자 춤): 최상음 2개(B, C)만 사용한 극단적 음의 절약

처음 들으면 매우 낯설게 느껴지지만, 음악 속에서는 익숙한 선율과 분위기가 갑자기 떠오르기도 합니다. 작품 곳곳에는 Robert Schumann의 Kinderszenen이나 독일 민요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숨어 있습니다.

이는 라헨만이 의도적으로 Ästhetisches Apparat (“미학적 장치”)라는 개념을 음악 안에 삽입했기 때문입니다. , 과거의 전통적 음악 형식과 관습을 새로운 맥락 속에 재배치함으로써, 청중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특수주법 가이드

라헨만의 특수주법은 악보 위에서는 비교적 명확해 보이지만, 실제 피아노 앞에 앉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 역시 서문만 꼼꼼히 읽으면 대부분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연주해보니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어려웠던 기법은 Silent Cluster였습니다.

Silent Cluster란 해머가 현을 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건반을 눌러 소리는 내지 않되, 현은 자유롭게 공명할 수 있도록 열어두는 기법입니다. 이후 다른 음을 강하게 치면, 조용히 눌러둔 현들이 미세하게 공명하며 울리게 됩니다. 바로 이 투명한 잔향이 라헨만이 의도한 음향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피아노마다 반응이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건반을 조금만 빨리 눌러도 해머가 현을 건드려 원하지 않는 소리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실제 공연에 사용할 악기로 반복 연습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제5곡에는 왼손으로 조용한 클러스터를 유지한 채 오른손이 강한 클러스터를 반복하는 구간이 있는데, 저는 처음 연습할 때 왼손 속도 조절만으로 한 시간 넘게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현대음악은정확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반대라고 느꼈습니다. 아주 작은 차이 하나만으로도 전체 음향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5곡 클러스터 주법 예시

 

제3곡은 소스테누토 페달의 유무에 따라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뉩니다. 소스테누토 페달은 그랜드 피아노의 가운데 페달로, 특정 음만 선택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는 장치입니다. 업라이트 피아노에는 이 기능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주자는 아예 다른 악보를 사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라헨만이 버전 모두 거의 동일한 음향 효과를 있도록 설계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악기의 물리적 구조에 따라 악보 자체가 달라지는 작품을 처음 접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가 피아노의 구조를 얼마나 깊이 연구했는지를 느낄 있었습니다.

 

연주상 핵심적으로 체크해야 할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건반을 누르는 속도와 깊이: 소리내지 않는 클러스터는 해머가 현에 닿지 않아야 하므로 매우 천천히, 그러나 박자 안에서 누른다
  • 오른쪽 페달 타이밍: 제2곡과 제7곡에서는 음을 치기 직전에 페달을 밟는 역방향 페달 기법이 요구된다
  • 손가락 독립성: 제5곡과 제6곡에서는 같은 손 안에서 일부 손가락은 누른 채, 다른 손가락만 떼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 셈여림 층위 분리: 제3곡과 제4곡에서 양손이 서로 다른 셈여림으로 움직일 때 두 층위가 명확히 구분되어 들려야 한다

 

저는 그동안 수많은 악기들을 반주하면서 다양한 현대음악들을 연주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깨달은 점은 내 자신이 정통 클래식에만 얽매어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클래식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정통성을 지켜야한다는 의무감이 있을텐데요. 그 틀을 깨고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도전적인 곡을 작곡한 작곡가들의 곡을 연습하면서 경이로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마치 일탈을 하는 듯한 새로운 재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참고: - Breitkopf & Härtel, Ein Kinderspiel 악보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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