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라헨만(Helmut Lachenmann)의 〈Ein Kinderspiel〉은 "어린이 놀이"라는 제목과 달리 사실 어린이가 연주하기 위한 곡이 아닙니다. 라헨만 스스로 "이 작품은 아이들을 위한 교재가 아니다"라고 명언했고, 저도 직접 파고들수록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점점 더 와닿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현대곡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한 이 곡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음표보다 기호가 많고, 서문만 한 페이지가 넘는데요. 오늘은 이처럼 정통 클래식과는 상반되는 라헨만의 곡을 분석해보고 제가 직접 연습하면서 느낀 꿀팁들을 적어보겠습니다. 분석에 앞서 라헨만이 직접 서문에 작성한 기보법과 연주법을 사진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기악구체음악
라헨만의 음악을 이해하려면 그가 직접 만들어낸 개념인 기악구체음악(Musique concrète instrumentale)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기악구체음악이란 전자 장비 없이 피아노나 현악기 같은 전통 악기를 사용하되, 정상적인 연주법 대신 악기의 물리적 속성을 극한까지 활용해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작곡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피아노에서 음표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피아노라는 기계에서 가능한 모든 소리 현상을 음악 재료로 쓰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이게 단순히 "이상하게 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깨닫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예를 들어 제6곡 '종탑(Glockenturm)'에서는 스타카토로 짧고 강하게 건반을 친 직후 소리를 내지 않고 그 건반을 다시 눌러야 합니다. 이것은 그랜드 피아노에만 존재하는 이중이탈장치(Double Escapement)를 활용한 기법입니다. 이중이탈장치란 1821년 세바스티안 에라르(Sébastien Érard)가 발명한 장치로, 하나의 건반을 빠르게 반복 타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메커니즘입니다. 라헨만은 이 장치의 작동 원리를 역이용해, 음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건반을 다시 조용히 눌러 잔향을 지속시키는 독특한 음향을 만들어냅니다.
〈Ein Kinderspiel〉은 1980년에 작곡된 7개의 소품 모음입니다. 라헨만이 직접 각 곡에 붙인 제목을 보면 그의 의도가 느껴집니다.
- 제1곡 Hänschen klein (꼬마 한스): 독일 동요 리듬을 인용, 피아노 88건반을 최고음에서 최저음까지 하행
- 제2곡 Wolken im eisigen Mondlicht (얼음같이 찬 달빛 속의 구름): 최고음역 8개 건반만 사용, 독특한 페달 기법
- 제3곡 Akiko (아키코): 백건과 흑건의 극단적 대비, 소스테누토 페달 유무에 따른 a·b 버전 분리
- 제4곡 Falscher Chinese (가짜 중국인): 오른손 백건, 왼손 흑건, 부점 리듬 효과
- 제5곡 Filter-Schaukel (필터 그네): 클러스터 고정 요소와 잔존 음향
- 제6곡 Glockenturm (종탑): 3성부 구조와 애프터터치 기법
- 제7곡 Schattentanz (그림자 춤): 최상음 2개(B, C)만 사용한 극단적 음의 절약
라헨만의 작품이 단순히 실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슈만의 〈어린이 정경(Kinderszenen)〉이나 독일 동요처럼 이미 우리 귀에 익숙한 '미학적 장치(Ästhetisches Apparat)'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학적 장치란 라헨만이 제안한 개념으로, 서양 음악사 속에 축적된 관습과 형식을 새로운 맥락 속에 재배치함으로써 청중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듣게 만드는 구성 방식입니다(출처: Breitkopf & Härtel).
특수주법 가이드
라헨만의 특수주법이 이론상으로는 명확해 보여도, 막상 피아노 앞에 앉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저도 처음엔 악보 서문을 정독하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실제로 연주해보니 생각보다 더욱 어려웠습니다.
대표적인 난관이 소리내지 않는 클러스터(Silent Cluster)입니다. 여기서 소리내지 않는 클러스터란 건반을 해머가 현을 치지 않을 만큼 천천히 눌러 소리는 내지 않되, 그 음의 현이 울릴 수 있는 상태로 열어두는 기법입니다. 이 상태에서 다른 음을 강하게 치면 공명 현상으로 눌러둔 음들이 희미하게 울리기 시작합니다. 이게 라헨만이 의도하는 투명한 잔향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이 기법은 건반을 누르는 속도가 조금만 빨라도 소리가 나버립니다. 제5곡에서 왼손으로 소리내지 않는 클러스터를 누른 채 오른손으로 강한 클러스터를 반복하는 구간이 있는데, 처음 연습할 때는 왼손 속도 조절에서만 1시간을 넘게 쏟아부은 기억이 납니다. "현대음악은 정확성이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라고 느꼈습니다. 타이밍 하나가 곡 전체의 음향을 좌우합니다.

제3곡에서는 소스테누토 페달(Sostenuto Pedal)의 유무에 따라 a버전과 b버전으로 나뉩니다. 소스테누토 페달이란 그랜드 피아노의 가운데 페달로, 특정 음만 선택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는 장치입니다. 업라이트 피아노에는 없는 경우가 많아 연주 환경에 따라 아예 다른 악보를 써야 하는데, 라헨만은 두 버전 모두 거의 동일한 음향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설계해두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작곡가가 피아노의 물리적 구조를 얼마나 깊이 연구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연주상 핵심적으로 체크해야 할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건반을 누르는 속도와 깊이: 소리내지 않는 클러스터는 해머가 현에 닿지 않아야 하므로 매우 천천히, 그러나 박자 안에서 누른다
- 오른쪽 페달 타이밍: 제2곡과 제7곡에서는 음을 치기 직전에 페달을 밟는 역방향 페달 기법이 요구된다
- 손가락 독립성: 제5곡과 제6곡에서는 같은 손 안에서 일부 손가락은 누른 채, 다른 손가락만 떼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 셈여림 층위 분리: 제3곡과 제4곡에서 양손이 서로 다른 셈여림으로 움직일 때 두 층위가 명확히 구분되어 들려야 한다
이 곡이 어렵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그 어려움이 기교적 난이도가 아니라 감각적 정밀함에서 온다는 점이, 제가 직접 부딪혀보고 난 후의 솔직한 평가입니다.
저는 그동안 수많은 악기들을 반주하면서 다양한 현대음악들을 연주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깨달은 점은 내 자신이 정통 클래식에만 얽매어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클래식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정통성을 지켜야한다는 의무감이 있을텐데요. 그 틀을 깨고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도전적인 곡을 작곡한 작곡가들의 곡을 연습하면서 경이로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마치 일탈을 하는 듯한 새로운 재미도 찾을 수 있습니다.
〈Ein Kinderspiel〉을 제대로 연주하려면 악보를 읽는 것과 피아노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추어야 합니다. 저는 이 곡을 준비하면서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라헨만이 탐구했던 "사용되지 않은 소리 속에 담긴 음악"이라는 명제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소리를 만들어보며 이해했습니다. 이 곡에 관심이 생겼다면 서문부터 꼼꼼히 읽고, 각 곡의 특수 기보법을 먼저 파악한 뒤 천천히 소리부터 확인해가는 순서를 권합니다.
참고: - Breitkopf & Härtel, Ein Kinderspiel 악보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