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퀼터의 엘리자베스 노래는 1907년 완성된 작품입니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선율 속에 시인의 감정과 작곡가의 의도가 정교하게 맞물려 있더군요. 퀼터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평생 100곡이 넘는 가곡을 남겼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시를 바탕으로 사랑과 슬픔, 자연을 노래하며 영국 가곡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7곡의 구조
첫 곡은 f단조 3/4박자로, 슬픔에 잠긴 이에게 더 이상 울지 말라고 위로하는 내용입니다. 전주부터 당김음과 일정박이 교차하며 6/8박자 느낌을 주는데, 이게 마치 요람을 흔드는 듯한 효과를 냅니다. 저는 반주를 칠 때 왼손 베이스가 ♩ ♪♩ 리듬으로 계속 변형되는 걸 보고, 퀼터가 일부러 리듬의 반복을 피해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려 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A부분(마디 1-20)은 p로 차분하게, A'부분(마디 21-42)은 pp로 한 옥타브 위에서 진행하며 'reconciling, peace' 같은 단어에 부합하는 고요함을 표현합니다.
두 번째 <My life's delight>는 사랑하는 이를 향한 벅찬 마음을 노래합니다. 전주에서 왼손이 A-B-C-C#-D-D#-E로 순차 상행하며 설렘을 암시하고, 'come'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며 최고음 A″까지 치솟습니다. 마디 15-21에서는 반대로 A-G-F#-F♮-E-D-C#-C♮-B로 순차 하행하며 'pain'이란 단어를 묘사합니다. A'부분(마디 21-47)에서는 반주가 한 옥타브 위로 올라가 'sweetness'를 부드럽게 레가토로 감싸고, 'beauty'에서는 긴 음가와 높은 음역으로 그 의미를 강조합니다. 솔직히 이 부분은 피아니스트 입장에서 손이 좀 바쁜데, 성악가의 열정을 받쳐주려면 페달을 섬세하게 조절해야 합니다.
세 번째 곡은 사랑하는 이의 입술을 담홍색 장미에 비유합니다. 짧은 19마디 안에 A-B 구조를 담았고, 2도·3도 순차 진행이 많아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합니다. B부분(마디 10-19)에서 F-B♭-D로 전조 되며 8분 음표가 등장해 약간 동적으로 바뀌는데, 이게 '장미꽃잎과 입술이 겹쳐 보이는 혼란'을 표현한 거라고 봅니다. 제 경험상 이 곡은 페달을 짧게 끊어 써야 선율이 또렷하게 들립니다.
네 번째는 지조 없는 양치기 소녀에게 버림받은 목동의 노래입니다. 9번 바뀌고, 엑센트가 불규칙해 변덕스러운 사랑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마디 13의 'Adieu'는 f로 꽉 찬 화성과 옥타브 반복으로 강조하지만, 바로 다음 마디 14 'untrue'는 p로 물러서며 8분 쉼표를 넣어 지친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대비가 퀼터 특유의 감정 묘사라고 생각 듭니다.
다섯 번째 곡은 자신의 사랑을 '갈색'에 비유하며 찬란한 '흰색'과 대비합니다. 'brown'이란 단어는 한 곳 빼고 모두 최고음 G″로 노래되어 사랑의 상징성을 부각합니다. 마디 14-16에서 G♭-a♭으로 전조 하며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마디 20-22에서 반주 상성부가 반음계적으로 진행하며 옥타브 진행과 대조를 이룹니다.

여섯 번째 곡은 나르시스를 위한 에코의 탄식을 담았습니다. 전주부터 아르페지오가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이어지며 분수처럼 흐르고, 이 패턴이 곡 전체를 지배합니다. 마디 36에서 'Drop'이 4번 반복되며 D-G, C-F로 동형 하행하는데, 눈 녹아 물방울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연주할 때 한 음 한 음 끊어치지만, 반주부는 B-C, A-B로 레가토로 이어져 대비를 만듭니다.

일곱 번째는 주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찬송가 스타일입니다. 전주·간주·후주가 모두 I-Ⅵ-V7 화성과 maestoso 악상으로 통일되어 웅장함을 줍니다. 마디 35에서 최고음 A♭″가 등장하며 'fall before thee'를 길게 노래하는 동안, 반주는 상행하며 후주와 맞물립니다. 저는 이 마지막 곡을 칠 때 엑센트와 테누토를 충분히 살려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반주 기법
이 연가곡집을 반주할 때 연주자가 마주하는 과제는 단순하면서도 매우 강렬합니다. 바로 시적인 언어를 순수한 소리의 영역으로 걸러내어 전달하는 것이죠. 로저 퀼터는 가사의 의미를 음악으로 고스란히 투영해 내는 ‘워드 페인팅(word painting)’의 거장이었습니다. 제1곡에서는 산봉우리를 표현하듯 'Snowy(눈 덮인)'라는 단어를 가장 높은음에 배치했고, 제6곡에서는 하늘로 떠오르는 태양을 시각화하듯 'Sunrise(일출)'라는 단어에 똑같이 최고음을 부여했습니다. 저는 이 구절들을 연주할 때, 평소보다 페달을 과감하게 조금 더 길게 가져가며 일종의 모험을 시도했습니다. 음향적인 공간감을 극대화해 거대한 고도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죠.
성악 선율과 피아노 반주가 계속해서 유니즌(동음)이나 옥타브 관계로 진행하기 때문에, 둘 사이의 밸런스를 조절하는 것 역시 외줄 타기처럼 정교한 작업입니다. 제1곡의 5~6마디와 A' 섹션인 24~25마디를 비교해 보면, 퀼터가 얼마나 영리하게 성부를 뒤바꿔 놓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5~6마디의 성악 멜로디가 24~25마디에서는 피아노의 상성부로 이동하고, 반대로 5~6마디에서 피아노가 연주하던 카운터 멜로디(대旋律)는 성악 파트로 옮겨갑니다. 이런 구간에서는 반주가 너무 커서 성악의 목소리를 집어삼켜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반주의 선율적 존재감이 완전히 죽어버릴 만큼 너무 작아서도 안 됩니다. 연습실에서 성악 파트너와 제가 찾아낸 해결책은 오른손 내성(안쪽 화음)의 볼륨을 성악 선율보다 살짝 낮춰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피아노가 화성적인 색채만 부드럽게 더해주면서 밸런스가 완벽하게 맞더군요.
리듬을 정교하게 처리하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4곡처럼 박자가 순식간에 바뀌는 곡에서는 의지할 지휘자가 따로 없습니다. 오직 성악가와 내가 나누는 공동의 호흡만으로 이 변화들을 넘어가야 하죠. 즉, 무대에 오르기 전에 박자가 전환되는 모든 축(피벗 포인트)들을 완벽하게 몸에 익히고 머릿속에 지도로 그려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제2곡 36마디의 'come, swift(오라, 신속하게)' 구절을 보면, 펼침음형이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이때 손과 손 사이로 음을 넘겨줄 때 아주 가볍고 부드럽게 이어 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swift'라는 가사가 가진 특유의 기민하고 빠른 생동감이 관객에게 전혀 살아나지 않으니까요.
극적인 악상 대비 역시 명확한 퀼터만의 시그니처입니다. 제5곡에서 'Adieu(안녕)'라는 단어는 아주 강렬하게 강조된 포르티시모($ff$)의 꽉 찬 화성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바로 이어지는 'untrue(거짓된)'라는 단어는 8분 쉼표와 함께 고요한 피아노로 뚝 떨어집니다. 지칠 대로 지쳐 완전히 방전되어 버린 마음을 기가 막히게 음악으로 시각화한 것이죠.
마지막 제7곡 역시 감정의 급반전을 보여줍니다. A 섹션은 강하고 대담한 메조포르테로 시작하지만, A' 섹션에 들어서면 난데없이 속삭이듯 부드러운 'piano dolce amoroso(부드럽고 사랑스럽게 피아노로)'로 바뀝니다. 만약 악보에 담긴 이러한 섬세한 감정 표현들을 놓쳐버린다면, 연주는 순식간에 지루하고 생기 잃은 소음이 될 것입니다. 결국 악보에 적힌 지시어들을 철저하게 따르면서도, 동시에 성악가의 목소리 톤을 예민하게 귀담아듣고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순발력이 비밀 열쇠인 셈입니다. 성악 반주가 이토록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첫 음부터 마지막 음이 끝날 때까지, 연주자는 언제나 팽팽한 줄 위에서 초집중 상태를 유지하며 유연하고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어야 하니까요.
페달링에서도 절제가 무척 중요합니다. 최소한으로 쓰되 극적인 효과를 내야 하죠. 순차 진행이 많고 서정적인 제3곡 같은 경우에는 페달을 아주 짧게 끊어 밟아 각 화음의 경계를 깔끔하고 선명하게 분리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반면, 제6곡의 화려하게 펼쳐지는 아르페지오 구간에서는 페달을 얕게 밟는 '하프 페달' 테크닉을 활용하면 화성을 지저분하게 뭉개지 않으면서도 물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잔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퀼터의 가곡은 서스테인 페달에 발을 얹어 뭉개기보다는 손끝의 섬세한 터치와 음색의 변화로 승부를 보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핵심 연주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시어의 의미에 맞춰 페달과 다이내믹 조절
- 성악 선율과 반주 내성의 밸런스 유지
- 박자 변화 지점 사전 체크 및 유연한 호흡
- 악상 대비를 통한 감정 표현
연습실에서 《엘리자베스 시에 의한 7개의 가곡(7 Elizabethan Lyrics)》을 치며 깨달은 것은, 퀼터가 어떻게 이토록 귀에 친숙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악을 쓸 수 있었는가에 대한 비밀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시와 소리의 유기적이고 완벽한 결합에 있었습니다. 그는 말 한마디가 가진 자연스러운 강세와 말맛(음보)을 정확한 음높이, 리듬, 그리고 화성으로 받아치는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곡에서 피아노는 더 이상 성악 밑에 깔리는 반주 악기가 아닙니다. 공간 안에서 성악가와 함께 살아 숨 쉬는 '또 하나의 목소리'입니다.
영국 가곡을 처음 접하는 분이 계신다면 진심을 담아 이 연가곡집으로 시작해 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음표 자체가 터무니없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멜로디와 시적인 텍스트가 어떻게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함께 숨 쉴 수 있는지, 가곡 반주의 가장 순수한 본질을 가르쳐주는 멋진 작품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