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작곡가 리스트를 화려한 건반 위의 마술사, 피아니스트로 알고 있을텐데요. 그런데 막상 그의 가곡 《Tre sonetti di Petrarca S.270》을 반주하게 되면서, 이 작품이 단순한 가곡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피아노 파트 하나만 봐도 오페라 한 편을 품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안에서 반주자의 역할이 얼마나 정교해야 하는지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배경
일반적으로 리스트 하면 비르투오소(Virtuoso) 피아니스트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비르투오소란 기교적으로 탁월한 연주자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용어로, 기교 자체가 예술적 목표가 되는 연주 스타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리스트의 가곡에도 그 화려함이 그대로 이식됐을 거라 짐작합니다. 제 경험상, 처음 악보를 펼쳤을 때 실제로 그런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좀 달랐습니다. 리스트는 1838년부터 1839년 사이에 《Tre sonetti di Petrarca S.270》을 작곡했는데, 이 시기는 그가 본격적으로 가곡을 쓰기 시작한 첫 시점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사실상 그의 첫 번째 가곡입니다. 그러다 로마에서 종교음악에 집중하며 약 10년간 가곡을 쓰지 않았고, 후기에 다시 가곡으로 돌아왔을 때는 오히려 절제되고 간결한 방향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 흐름을 알고 나면, 페트라르카 소네트 작품을 대하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이 작품은 화려함 그 자체가 아니라, 리스트가 막 가곡이라는 장르에 발을 들이던 시점의 실험적 에너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 혼재된 느낌이 오히려 이 작품을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구조
이 작품에 대해 알려진 설명 중 하나는 "오페라적 요소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만 들으면 막연합니다. 제가 직접 연주해보니, 그 오페라적 요소가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나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Recitativo Accompagnato) 기법입니다.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란 단순한 건반 화음 반주가 아니라 선율을 가진 관현악 반주가 붙는 낭창 방식으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장면에서 주로 쓰입니다. 첫 번째 곡 'Pace non trovo'의 도입부가 바로 이 기법으로 쓰였습니다. 피아노가 먼저 질문을 던지고 성악이 대답하는 구조, 중간에 삽입되는 짧은 반주, 'declamato(낭독하듯이)'라는 지시어가 그 증거입니다.
둘째는 아리아적 서정성입니다. 레치타티보 이후 긴 간주를 지나 나타나는 셋잇단음표 펼침화음 반주 위의 서정적 선율이 아리아에 해당합니다. 두 성격이 한 곡 안에서 명확히 대비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리스트가 세 곡 모두 A♭ major 조성을 유지한 것도 처음엔 단순한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공통 조성을 쓴 이유를 파악하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세 곡의 가사가 모두 페트라르카의 시집 『칸초니에레(Canzoniere)』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연결되어 있고, 라우라를 향한 사랑이라는 정서적 통일성을 음악적으로도 표현하려 했던 것입니다.
워드 페인팅(Word Painting) 기법도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워드 페인팅이란 가사의 의미를 음악으로 직접 그려내는 기법으로, 예를 들어 '하늘을 난다'는 가사에 상행하는 선율을 붙이거나, '눈물'에 반음계 하행 진행을 사용하는 식입니다. 세 번째 곡 'I vidi in terra angelico costumi'의 전주에서 베이스 지속음은 땅(terra)을, 셋잇단음표 화음의 움직임은 천사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상성부 선율은 천사의 자태(angelico costumi)를 각각 묘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이 전주를 연주해보면서 그 층위를 인식했을 때, 리스트가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했는지 새삼 놀랐습니다.
리스트가 소네트 형식을 음악에 담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소네트는 8행(옥타브)+6행(세스텟)의 구조를 가집니다. 슈베르트나 브람스는 세스텟의 짧은 길이를 빠른 전개로 처리했지만, 리스트는 반대로 그 짧아진 행을 음악적으로 채워 길이의 균형을 맞췄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을 씁니다.
- 중요한 행이나 단어를 반복하여 음악적 길이를 두 배로 늘림
- 행과 행 사이가 아닌 행 내부에 간주를 삽입
- 단어를 나열하거나 음가를 극도로 길게 연장
실제로 제가 마디 수를 세어보니, 이렇게 늘어난 행의 마디 수가 같은 단락 다른 행의 약 두 배에 달했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철저한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반주법
이 곡을 연주해본 분들은 알겠지만, 리스트의 피아노 파트는 피아노 협주곡 수준의 테크닉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테크닉이 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피아니스트는 어려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강조를 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 본능을 억제해야 합니다.
'Pace non trovo' 전주의 반음계 상행 진행이 대표적입니다. 반음계적 진행(Chromatic Progression)이란 반음 간격으로 연속적으로 이동하는 선율이나 화성 진행을 말하며, 조성적 안정감보다는 긴장감과 불안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이 전주에서 피아노는 끊임없이 반음씩 상행하며 페트라르카의 혼란한 심리를 그려냅니다. 그런데 반박자마다 화성 베이스가 바뀌고 쉼표도 많아서 페달을 잘못 쓰면 음향이 지저분해집니다. 저도 처음에 페달을 너무 길게 쓰다가 음들이 뭉개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울림이 불필요하게 길어지지 않도록 페달 타이밍을 매우 짧게 가져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두 번째 곡 'Benedetto sia'l giorno'에서는 당김음 리듬이 반주 전체를 지배합니다. 이 당김음이 자칫 오른손에 과한 악센트를 만들어서 성악 선율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반주하다 보면 당김음의 첫 음에 자꾸 힘이 들어가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억제해야 합니다. 또한 이 곡은 조성이 자주 바뀌는데, D major, B major를 거쳐 다시 A♭ major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이명동음(Enharmonic) 전조가 사용됩니다. 이명동음 전조란 소리는 같지만 표기가 다른 음을 이용해 조성을 전환하는 기법으로, 청중이 전조를 눈치채지 못하게 부드럽게 연결하는 후기 낭만주의의 대표적 특징입니다. 반주자는 이 전조 지점에서 음색을 섬세하게 바꾸어 화성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들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세 번째 곡에서 셋잇단음표 펼침화음 반주를 칠 때 엄지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음형이 두 개의 단위로 쪼개져 들립니다. 한 선으로 균일하게 흘러야 하는데, 저도 처음엔 이게 잘 안 됐습니다. 의식적으로 엄지를 가볍게 두고, 음형 전체를 하나의 호흡으로 연결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낭만주의 음악에서 리스트의 반음계적 화성 진행이나 이명동음 전조 기법은 후기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습니다(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음악 용어 참조).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가 서양 문학사에서 소네트 형식의 정전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리스트의 이 가곡 작품도 낭만주의 가곡의 흐름 안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출처: 한국음악학학회).
리스트 가곡을 처음 접하는 반주자라면 아래 사항을 특히 주의하기를 권합니다.
- 비르투오소적 테크닉은 음악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다루어야 함
- 당김음 반주에서 오른손 악센트를 의식적으로 억제할 것
- 펼침화음 음형은 한 선으로 균일하게 연주할 것
- 이명동음 전조 지점에서 음색 변화를 의도적으로 만들 것
- 성악가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듣고 반주의 다이나믹을 조율할 것
이 작품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리스트의 음악에서 피아노는 배경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동등한 파트너이면서도 성악을 빛나게 해야 하는 이중적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합니다. 이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가 이 작품 연주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페트라르카의 시가 담고 있는 사랑의 고뇌와 황홀함을 음악으로 전달하려면, 반주자도 그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연주에 녹여내야 합니다. 악보를 읽는 것을 넘어 시를 읽고, 리스트가 왜 이 지점에서 이 화성을 썼는지를 질문하는 과정이 이 작품을 제대로 연주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