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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 BACH 푸가 (BACH모티브, 주제변형기법, 테크닉)

by 진헤 2026. 4. 14.

오르간 연주 사진

 

 

리스트의 Phantasie und Fuge über das Thema BACH는 단순히 손가락 기술이 좋다고 해결되는 곡이 아닙니다. BACH라는 네 글자가 어떻게 300마디 넘는 대곡 전체를 지배하는지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연습 방향이 잡혔습니다.

BACH모티브, 이 네 음이 왜 그렇게 특별한가

혹시 한 작품의 주제가 단 네 개의 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너무 단순한 것 아닌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BACH 모티브는 독일 음이름 체계에서 B♭-A-C-B♮에 해당하는 네 음으로, 바흐의 이름 자체를 선율로 치환한 것입니다. 여기서 독일 음이름 체계란 영어권에서 B♭을 'B'로, B♮을 'H'로 표기하는 방식으로, 독일어 알파벳 B·A·C·H가 그대로 음표가 되는 구조입니다.

이 모티브의 음정 구조가 흥미롭습니다. 단2도 하행, 단3도 상행, 단2도 하행 순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단2도 음정은 곡 전체의 반음계적 진행을 이끄는 뿌리가 되고, 단3도는 감7화음의 기본 구성 요소가 됩니다. 감7화음이란 세 개의 단3도가 쌓인 화음으로 매우 불안정하고 긴장된 음색을 내는 화성 구조입니다. 리스트가 이 곡 전반에서 비조성적인 분위기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BACH 네 음 안에 그 씨앗이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모티브를 처음 분석했을 때 "이게 정말 하나의 동기로 300마디를 만들 수 있다고?" 하며 반신반의했는데, 실제 악보를 짚어보니 환타지 도입부부터 코다 마지막 화음까지 예외 없이 등장한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바흐 본인도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선율을 미완성 푸가 Die Kunst der Fuge에 남겼고, 이후 슈만이 1845년 이 동기로 6개의 푸가를 작곡하는 등 여러 작곡가들이 이 모티브를 이어받았습니다(출처: IMSLP 국제악보도서관).

주제변형기법, 리스트가 곡을 지배하는 방식

그렇다면 단 네 음이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곡 전체에서 신선하게 들릴 수 있을까요? 그 답이 바로 주제변형기법(Transformation of theme)입니다. 주제변형기법이란 하나의 주제나 모티브를 제시한 뒤, 그것의 리듬·박자·음정·강약·선율을 변형시켜 다양한 형태로 재등장시키는 작곡 방법론입니다. 쉽게 말해, 같은 DNA를 가진 선율이 어떤 곳에서는 느리고 장엄하게, 어떤 곳에서는 빠르고 화려하게 얼굴을 바꿔 나타나는 것입니다.

환타지 A부분(1-34마디)에서 BACH는 옥타브 진행으로 세 옥타브에 걸쳐 강렬하게 제시됩니다. 그러다 B부분(35-92마디)에서는 16분음표 분산화음 속에 녹아들고, 푸가로 넘어가면 4성부가 차례로 주제를 모방하는 제시부(Exposition) 구조로 등장합니다. 제시부란 푸가에서 각 성부가 순서대로 주제와 응답을 제시하는 도입 단락입니다. 테너에서 시작된 주제가 알토, 소프라노, 베이스 순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을 악보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 곡이 단순히 화려한 리스트 피아노 음악이 아니라 바로크의 엄격한 대위법 구조 위에 낭만의 색채를 입힌 작품임을 체감하게 됩니다.

이 작품의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Phantasie (마디 1-92): B♭장조와 C장조를 오가며 Moderato-Allegro vivace-Allegro로 속도 변화
  • Fuge (마디 93-274): 안단테로 시작해 Allegro con brio까지 확대되며 e단조, f단조 등 빈번한 전조
  • Coda (마디 275-314): B♭장조로 귀환, Maestoso의 웅장한 마무리

제가 직접 코다 부분을 연습해봤는데, 악보상 마디 307부터 B♭음이 4옥타브를 오르내리며 6번 반복되는 구간에서 분량을 느끼기보다는 선율의 방향성을 몸으로 따라가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연주로 이어졌습니다.

 

테크닉

이 곡을 연주하면서 가장 실감한 것은, 테크닉이 음악적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도입부 1-4마디에서 왼손이 BACH 모티브를 세 옥타브에 걸쳐 오스티나토(Ostinato)로 제시합니다. 오스티나토란 특정 음형을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높이로 반복하는 작법으로, 여기서는 주제 모티브를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이 부분을 연주할 때 건반에서 팔을 높이 들어 중력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을 쓰면 깊고 울림 있는 소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리스트가 개발하고 루빈스타인, 라흐마니노프가 계승한 무게 테크닉(weight technique)이 바로 이것입니다.

싱코페이션 페달(syncopation pedal) 사용도 핵심입니다. 싱코페이션 페달이란 음을 친 후에 페달을 밟고, 다음 음을 친 순간 페달을 떼었다가 즉시 다시 밟는 주법으로, 레가토 효과를 내면서도 화음의 흐림을 최소화하는 방법입니다. 오른손 화음이 긴 프레이즈로 이어져야 하는 환타지 A부분에서 이 방법을 쓰지 않으면 음들이 뚝뚝 끊기거나 반대로 지저분하게 섞이는 결과가 나옵니다.

248마디부터 시작되는 프레스토 구간은 솔직히 저도 처음에 몇 달을 고전한 부분입니다. 왼손의 BACH 모티브와 오른손의 4옥타브 감7화음이 여섯잇단음표로 교차하는 이 클라이막스 구간에서 양손 균형을 잡는 것이 관건입니다. 왼손 첫 음을 중심축으로 삼아 그것을 기준으로 오른손 속도를 맞추는 것이, 제가 여러 방법을 시도해본 결과 가장 안정적이었습니다.

연주 시 점검해야 할 핵심 기술 항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르페지오: 엄지 이동 시 손을 건반과 평행으로 유지하고, 팔의 무게 없이 가볍게 이동
  • 트레몰로: 손등을 유연하게 움직이며 손에 힘을 빼고 손 크기를 옥타브 간격으로 고정
  • 크로스 핸드 기법: 16분음표 첫 박의 왼손 첫 음에 강조를 주고 반동으로 이동
  • 옥타브 패시지: 팔 근육 이완 상태에서 중력에 의해 떨어뜨리는 터치로 자연스러운 큰 소리 확보

이 곡을 완성도 있게 연주한다는 것은 바흐에 대한 리스트의 존경심과 낭만주의 음악어법, 그리고 바로크의 대위법 구조가 하나로 어우러진 지점을 청중에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Phantasie und Fuge über das Thema BACH는 단지 기술을 과시하는 곡이 아닙니다. BACH 네 음이 어디서 어떻게 변형되어 나타나는지를 연주자 스스로 들을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이야기가 청중에게도 전해집니다. 이 곡을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전체 악보를 보기 전에 BACH 모티브를 먼저 피아노로 짚어보고, 그 음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신하는지를 귀로 추적해보시길 권합니다. 그 순간부터 이 곡은 전혀 다르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참고: - IMSLP 국제악보도서관. Franz Liszt - Prelude and Fugue on the name BACH. https://imslp.org

  • Oxford Music Online / Grove Music. Fantasia; Fugue. https://www.oxfordmusiconline.com
  • 세광음악출판사 편집국, 「명곡해설전집」,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3
  • 신혜진, 「F. Liszt의 피아노 기법 연구」, 석사학위논문,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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