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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과 역사 (왕실 후원, 전쟁과 음악, 민족 독립)

by 진헤 2026. 1. 23.

바로크건물

 

음악은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의 향연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정치·사회·문화가 고스란히 녹아든 역사의 증언입니다. 특히 클래식 음악은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의 권력 구조, 전쟁의 참혹함, 민족의 열망을 생생하게 담아내며 발전해왔습니다. 바흐와 헨델의 시대부터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음악은 왕실의 후원 속에서 꽃피우기도 하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역사와 어떻게 함께 숨 쉬어 왔는지, 그 깊이 있는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왕실 후원과 음악의 발전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크 시대부터 고전파 시대에 이르기까지, 음악가들은 교회나 궁정의 후원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바흐는 독일 교회에서 활동하며 칸타타와 오르간 음악을 작곡했고, 동시대를 살았던 헨델은 궁정 작곡가로서 대중적인 콘서트와 오페라를 통해 흥행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후원 시스템의 성격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미술, 건축, 조각,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술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로렌초 데 메디치는 '위대한 메디치'로 불리며 수많은 음악가를 후원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가 음악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직접 발레 무대에 올라 춤을 추었고, 몰리에르가 각본을 쓰고 릴리가 작곡한 작품들을 통해 프랑스 오페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릴리의 '서민 귀족'은 가짜 귀족을 풍자하는 코메디로, 왕실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릴리는 지휘할 때 거대한 지팡이를 바닥에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는데, 이 지팡이로 자신의 발등을 찍어 염증이 악화되어 사망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습니다. 이는 음악사에서 가장 독특한 죽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헨델이 왕실의 후원을 받아 이탈리아 오페라를 정착시켰으나,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나중에는 영어로 노래하는 오라토리오로 전환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메시아'에 포함된 '할렐루야'는 이러한 전환의 결실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빈에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활동했습니다. 요제프 2세와 프란츠 2세는 음악을 극진히 사랑했고, 황제의 취향에 따라 작곡가들의 운명이 좌우되기도 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궁정 작곡가 자리를 얻지 못했지만, 대중적 오페라를 통해 명성을 쌓았습니다.


전쟁과 음악


음악은 전쟁의 참혹함과 승리의 환희를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강력한 매체입니다. 쇼팽의 에튀드 '혁명'은 1831년 폴란드가 러시아에 대항한 봉기가 실패로 끝난 후, 비엔나에서 파리로 망명하던 중 작곡되었습니다. 폴란드는 당시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의해 분할 지배되고 있었고, 1830년의 봉기는 자유를 향한 처절한 투쟁이었습니다. 쇼팽은 이 실패한 봉기를 슬퍼하며 격렬하고 비극적인 에튀드를 만들어냈습니다. 피아노 독주곡임에도 불구하고 그 강렬함과 힘은 자유를 위한 투쟁의 격정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반면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은 승전의 기쁨을 담은 음악입니다. 이탈리아가 통일운동을 펼치던 시기, 오스트리아의 라데츠키 장군이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지역에서 이탈리아군의 봉기를 진압한 것을 기리기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빈 신년음악회에서 앵콜곡으로 자주 연주되며 청중들이 박수로 호응하는 이 곡은,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신나는 승전가이지만, 이탈리아나 식민지를 겪었던 나라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곡일 수밖에 없습니다. 음악이 신난다고 해서 모두가 박수를 칠 만한 곡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가장 처참한 전쟁 속에서 탄생한 음악으로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꼽을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872일, 거의 3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포위했습니다. 이는 전쟁사에서 가장 긴 포위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위된 도시 안에서는 식량과 물자가 끊겨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지만, 시민들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포위망을 탈출한 후에도 그 참상을 잊지 못하고 이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도시 안에 남아 있던 오케스트라는 많은 단원을 잃었지만, 아마추어 연주자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군인들까지 동원하여 연습했습니다. 아사 직전의 상태에서 연주한 이 곡은 전 세계에 방송되며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스네어드럼이 끝없이 쳐들어오는 나치 군대를 표현하는 이 곡은, 전쟁의 참혹함을 음악으로 증언한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민족 독립과 음악


음악은 때로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염원하는 강력한 상징이 됩니다. 19세기 이탈리아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상당 부분이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민족은 리소르지멘토(통일운동)를 통해 하나의 국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있었고, 사람들은 "비바 베르디(Viva VERDI)"를 외치며 그를 지지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작곡가 베르디를 응원하는 구호가 아니라, "Vittorio Emanuele Re D'Italia(빅토리오 엠마누엘레, 이탈리아의 왕)"의 약자였습니다.
베르디는 초기 오페라 두 작품이 실패한 후 작곡을 그만두려 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에게 오페라 대본을 건네주었고, "날아가자, 황금 날개를 등에 붙이고"라는 가사를 보며 다시 기운을 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구약성경의 나부코도노소르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 '나부코'입니다. 이 오페라에는 바빌론의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합창곡이 등장합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불리는 이 곡은 통일 이탈리아를 꿈꾸던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언어와 문화가 억압받고 있었고, 공연조차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검열 당국은 이 오페라를 금지하려 했지만, 내용이 성경 이야기였기 때문에 통과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대 위의 히브리 노예들을 보며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렸고, 베르디는 리소르지멘토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도 귀족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유명합니다. 보마르셰의 3부작 중 2부인 이 작품은 귀족이 하인의 신부를 탐하는 초야권을 주장하며 벌어지는 코미디입니다. 비엔나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이 오페라를 음악적으로는 칭찬했지만, 뒤에서는 모차르트를 비난했습니다. 반면 체코 프라하에서는 이 작품이 큰 사랑을 받았고, 모차르트는 그곳에서 활동하며 '프라하 교향곡'을 발표했습니다.
조지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는 미국 흑인 음악인 재즈를 클래식 형식으로 승격시킨 작품입니다. 1924년 26세의 거쉰은 할렘 지역에서 흑인들과 어울리며 재즈를 공부했고, 피아노 협주곡 형태의 자유로운 랩소디를 만들어냈습니다. 초연 당시 빅밴드 오케스트라는 모두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흑인 예술가들은 여전히 하류층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곡은 재즈가 고급 예술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었고, 이 음악은 그러한 차별의 역사까지 담고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단순히 악보에 담긴 음표의 나열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녹아든 역사의 기록입니다. 왕실의 후원 속에서 꽃피운 화려함,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울려 퍼진 저항의 선율,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불렀던 합창은 모두 음악이 역사와 함께 숨 쉬어 온 증거입니다. 연주자는 악보만 보고 연주할 것이 아니라,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이해할 때 비로소 깊이 있고 성숙한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은 세상을 가장 훌륭하게 바꿀 수 있는 예술이며, 예술가는 그 책임을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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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EBSCulture (EBS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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