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오래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어? 이 선율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싶은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저도 슈만의 Fantasie Op. 17을 처음 들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분명 Robert Schumann의 음악인데, 어딘가에는 Ludwig van Beethoven의 흔적이 들리고, 또 어떤 구절은 Clara Schumann의 작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모두 의도된 인용이었습니다. 이 한 작품 안에 슈만은 자신의 사랑, 문학적 감수성, 그리고 음악적 언어를 모두 엮어 넣었던 것입니다.
선율 인용
보통 다른 작곡가의 선율을 사용하면 독창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슈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제가 직접 악보를 분석해 보니, 그는 단순히 선율을 빌려온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메시지를 암호처럼 숨겨 두고 있었습니다.
Fantasie Op.17 제1악장의 첫 주제는 A-G-F-E-D의 하행 선율로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클라라 모티브’입니다. 이 선율은 클라라 슈만의 작품 Soirées musicales Op.6 No.2 'Notturno'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가 두 사람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하던 시절, 슈만은 이 선율을 통해 작품 안으로 클라라를 불러들였습니다.
슈만이 클라라에게 “1836년의 불행한 여름, 내가 당신을 포기해야 했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이 Fantasie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첫 몇 마디가 전혀 다르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주제 인용(thematic quotation)이란 다른 작곡가의 선율을 자신의 작품 안에 의도적으로 삽입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기법을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원곡이 가진 감정적 맥락까지 새로운 작품 안으로 함께 옮겨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인용은 제1악장 코다에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베토벤의 연가곡 An die ferne Geliebte, Op.98(멀리 있는 연인에게) 제6곡의 첫 선율입니다. 이 연가곡은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클라라와 강제로 떨어져 있어야 했던 슈만 자신의 상황과도 절묘하게 겹쳐집니다.
*참고. 이 베토벤의 연가곡은 제가 이전 글에서 자세히 분석했었는데요.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베토벤 An die ferne Geliebte)
이 베토벤 선율은 제2악장에서도 두 번 더 등장합니다. 이렇게 동일한 선율이 여러 악장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를 순환 형식(cyclic form)이라고 합니다. 즉, 작품 전체가 공통된 모티브와 주제를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단순한 3악장 구성이라기보다, 하나의 긴 감정 서사처럼 느껴집니다.
Fantasie Op.17에서 나타나는 선율 인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제1악장: 클라라 슈만의 Soirées musicales Op.6 No.2 선율 인용
- 제1악장 코다와 제2악장: 베토벤 An die ferne Geliebte Op.98 No.6 인용
- 전체 작품: 세 악장 전체를 관통하는 순환 형식 구조
슈만 음악의 문학적 배경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작품의 서두에서 슈만은 낭만주의 시인 Friedrich von Schlegel의 시 Abendröte (“저녁 노을”)를 직접 인용합니다.
세상을 떠도는 수많은 소리 가운데
몰래 귀 기울이는 이에게만
하나의 부드러운 음이 들린다.
여기서 그 “부드러운 한 음”은 분명 클라라를 암시합니다. 음악과 시를 하나로 결합하는 능력은, 제가 생각하기에 슈만을 다른 낭만주의 작곡가들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형식 분석과 연주법
이 곡을 처음 연습할 때 제가 가장 당황했던 부분은 형식이 예상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소나타 형식(sonata form)이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제시부-발전부-재현부의 구조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Fantasie Op.17 제1악장은 이 원칙을 의도적으로 어기고 있습니다.
제1주제의 조성이 C장조인데 제2주제는 딸림조인 G장조 대신 d단조로 등장합니다. 재현부에서도 원조 C장조 대신 E♭장조로 주제가 돌아옵니다. 일반적으로 소나타 형식에서는 재현부가 반드시 원조로 돌아와야 한다고 배웁니다만, 슈만은 그 규칙을 거부했습니다. 실제로 연주해 보니 이 조성 이탈이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곡 전체에 계속되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장치라는 걸 느꼈습니다.
제2악장은 론도 형식(rondo form)으로 구성됩니다. 론도 형식이란 주제가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각기 다른 에피소드가 삽입되는 구성입니다. Fantasie Op.17 제2악장은 A-B-A'-C-A"-B'-Coda의 구조를 따르는데, 코다에서 앞서 나오지 않은 새로운 소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자유롭습니다. 행진곡 풍의 강렬한 리듬과 대위법적 성부 진행이 인상적입니다. 저의 경험상 이 악장이 가장 체력 소모가 큰 악장이었습니다. 특히 코다 부분의 붓점 리듬을 유지하면서 옥타브 도약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제3악장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하게 들리지만, 구조를 뜯어보면 가장 자유롭습니다. 발전부가 통째로 생략되고 경과부가 그 자리를 채우며, 재현부에서는 제1주제 없이 바로 제2주제로 넘어갑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 부분에서 악보를 잘못 읽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맞는 것입니다. 슈만이 의도적으로 그 구조를 선택한 것이고, 그 덕분에 마지막 악장은 격렬한 1, 2악장의 파고 끝에 고요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줍니다.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 연구의 권위 있는 자료인 John Gillespie의 낭만과 피아노 음악에 따르면, 슈만의 성격소품은 고전적 형식에 문학적 상상력을 접목한 결과물로 평가됩니다(출처: 경북대학교 출판부). 이 곡의 형식적 특징과 연주법에 대한 분석 또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악장 전체를 통해 확인되는 슈만 Fantasie Op.17의 형식적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제1악장: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조성 관계가 C장조-d단조로 전통 규칙 이탈
- 제2악장: 자유로운 론도 형식. 행진곡 풍, 대위법적 기법, 코다에 새로운 소재 삽입
- 제3악장: 발전부 생략, 재현부에서 제1주제 생략 후 제2주제로 직행하는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슈만은 이 세 악장을 단 3도 관계의 조성(C-E♭-C)으로 연결하여 악장 간의 통일성도 만들었습니다. 이런 세밀한 설계를 알고 연주하면 곡이 훨씬 다르게 들립니다. 처음에는 그냥 낭만적이고 어려운 곡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다시 들으니 슈만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했는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Fantasie Op.17은 단순히 기교가 어려운 곡이 아닙니다. 선율 인용의 의미, 형식 이탈의 이유, 시와 음악의 관계를 이해하고 연주할 때 비로소 이 곡이 말하려는 것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곡을 준비하는 분이라면 악보를 펼치기 전에 슈만과 클라라의 이야기를 먼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 배경을 알고 제1악장의 첫 몇 마디를 들으면, 그 하행 선율이 단순한 음표가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부름으로 들릴 것입니다.
브람스 Op.119 완전분석 (작품배경, 악곡분석, 연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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