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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 Fantasie Op.17 (선율 인용, 형식 분석과 연주법)

by 진헤 2026. 4. 22.

작곡가 슈만

 

 

피아노를 오래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 곡, 어디서 들어본 선율인데?" 싶은 순간이 옵니다. 저도 슈만의 Fantasie Op.17을 들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요. 분명 슈만의 곡인데 어딘가 베토벤 냄새가 나고, 또 어딘가는 클라라의 작품에서 본 듯한 멜로디가 스쳐 지나가는 느낌. 알고 보니 그게 전부 의도된 인용이었습니다. 이 곡 하나 안에 슈만의 사랑, 문학적 감수성, 음악적 어법이 한꺼번에 담겨 있습니다.

선율 인용

일반적으로 다른 작곡가의 선율을 가져다 쓰면 독창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슈만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제가 직접 악보를 분석해보니, 그가 선율을 인용하는 방식은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감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암호에 가까웠습니다.

Fantasie Op.17의 제1악장 제1주제는 A-G-F-E-D의 순차 하행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클라라 선율'입니다. 클라라 슈만의 작품 Soirées musicales Op.6 No.2 'Notturno'에서 가져온 멜로디입니다. 클라라와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던 아버지 비크 때문에 두 사람이 떨어져 있던 시절, 슈만은 이 선율을 통해 클라라를 곡 안에 불러들인 것입니다. 슈만이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당신을 체념했던 1836년의 불행한 여름을 생각한다면 이 곡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첫 몇 마디가 다르게 들립니다.

여기서 주제 인용(thematic quotation)이란 자신의 작품 안에 타인의 선율을 의도적으로 삽입해 의미를 부여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단순한 모방과 달리, 원곡의 정서적 맥락을 함께 끌어오는 것이 핵심입니다.

 

제1악장의 코다에는 또 하나의 인용이 등장합니다. 베토벤의 연가곡 An die ferne Geliebte(멀리 있는 연인에게) Op.98 제6곡의 첫 주제 선율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An die ferne Geliebte란 "멀리 있는 연인에게"라는 뜻의 베토벤 연가곡으로, 멀리 떨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슈만이 클라라와 강제로 헤어져 있던 상황과 절묘하게 겹칩니다.

 

제2악장에도 이 베토벤 가곡의 선율이 두 차례 더 인용됩니다. 같은 선율이 세 악장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조를 순환 형식(cyclic form)이라고 하는데, 순환 형식이란 각 악장이 공통된 주제나 선율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작품 구성 방식입니다. 이 구조 덕분에 세 악장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읽힙니다.

 

슈만 Fantasie Op.17에서 확인되는 선율 인용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1악장 제1주제: 클라라의 Soirées musicales Op.6 No.2에서 가져온 A-G-F-E-D 하행 선율
  • 제1악장 코다 및 제2악장: 베토벤 An die ferne Geliebte Op.98 제6곡 선율 인용
  • 전체 3악장: 동일 선율이 반복 등장하는 순환 형식 구조

슈만 음악의 문학적 배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쉴레겔(Friedrich von Schlegel)의 시 Abendrüte(저녁 노을)를 이 곡의 서두에 직접 실었습니다. "들려오는 여러 소리 가운데 / 부드러운 한 음이 속삭이듯 들린다 / 듣고자 열심히 귀 기울이는 이에게"라는 구절에서 '부드러운 한 음'은 클라라를 암시합니다. 음악과 시가 하나로 묶이는 방식, 그게 슈만이 다른 낭만주의 작곡가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식 분석과 연주법

이 곡을 처음 연습할 때 제가 가장 당황했던 부분은 형식이 예상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소나타 형식(sonata form)이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제시부-발전부-재현부의 구조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Fantasie Op.17 제1악장은 이 원칙을 의도적으로 어기고 있습니다.

제1주제의 조성이 C장조인데 제2주제는 딸림조인 G장조 대신 d단조로 등장합니다. 재현부에서도 원조 C장조 대신 E♭장조로 주제가 돌아옵니다. 일반적으로 소나타 형식에서는 재현부가 반드시 원조로 돌아와야 한다고 배웁니다만, 슈만은 그 규칙을 거부했습니다. 실제로 연주해보니 이 조성 이탈이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곡 전체에 계속되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장치라는 걸 느꼈습니다.

 

제2악장은 론도 형식(rondo form)으로 구성됩니다. 론도 형식이란 주제가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각기 다른 에피소드가 삽입되는 구성입니다. Fantasie Op.17 제2악장은 A-B-A'-C-A"-B'-Coda의 구조를 따르는데, 코다에서 앞서 나오지 않은 새로운 소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자유롭습니다. 행진곡 풍의 강렬한 리듬과 대위법적 성부 진행이 인상적입니다. 저의 경험상 이 악장이 가장 체력 소모가 큰 악장이었습니다. 특히 코다 부분의 붓점 리듬을 유지하면서 옥타브 도약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제3악장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하게 들리지만, 구조를 뜯어보면 가장 자유롭습니다. 발전부가 통째로 생략되고 경과부가 그 자리를 채우며, 재현부에서는 제1주제 없이 바로 제2주제로 넘어갑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 부분에서 악보를 잘못 읽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맞는 것입니다. 슈만이 의도적으로 그 구조를 선택한 것이고, 그 덕분에 마지막 악장은 격렬한 1, 2악장의 파고 끝에 고요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줍니다.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 연구의 권위 있는 자료인 John Gillespie의 낭만과 피아노 음악에 따르면, 슈만의 성격소품은 고전적 형식에 문학적 상상력을 접목한 결과물로 평가됩니다(출처: 경북대학교 출판부). 이 곡의 형식적 특징과 연주법에 대한 분석 또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악장 전체를 통해 확인되는 슈만 Fantasie Op.17의 형식적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제1악장: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조성 관계가 C장조-d단조로 전통 규칙 이탈
  • 제2악장: 자유로운 론도 형식. 행진곡 풍, 대위법적 기법, 코다에 새로운 소재 삽입
  • 제3악장: 발전부 생략, 재현부에서 제1주제 생략 후 제2주제로 직행하는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슈만은 이 세 악장을 단 3도 관계의 조성(C-E♭-C)으로 연결하여 악장 간의 통일성도 만들었습니다. 이런 세밀한 설계를 알고 연주하면 곡이 훨씬 다르게 들립니다. 처음에는 그냥 낭만적이고 어려운 곡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다시 들으니 슈만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했는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Fantasie Op.17은 단순히 기교가 어려운 곡이 아닙니다. 선율 인용의 의미, 형식 이탈의 이유, 시와 음악의 관계를 이해하고 연주할 때 비로소 이 곡이 말하려는 것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곡을 준비하는 분이라면 악보를 펼치기 전에 슈만과 클라라의 이야기를 먼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 배경을 알고 제1악장의 첫 몇 마디를 들으면, 그 하행 선율이 단순한 음표가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부름으로 들릴 것입니다.

 

*[참고] 슈만과 함께 읽으면 좋은 낭만주의 해석법

 

브람스 Op.119 완전분석 (작품배경, 악곡분석, 연주법)

브람스의 작품은 굉장히 내면적이고 깊이있는 화음이 특징적입니다. 전 사실 현대음악은 자신있게 연주할 수 있지만, 브람스의 곡처럼 깊이있는 음악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참 많았습니다. 브

kezynn.com

 


참고: - 하애자, 슈만 피아노문헌-독주곡 편, 음악춘추사, 1991

  • John Gillespie, 낭만과 피아노 음악, 경북대학교 출판부, 2010
  • 김선옥, "R. Schumann의 음악과 문학성 연구: 크라이슬레리아나 Op.16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 이미숙, "R. Schumann의 Fantasie Op.17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 음악지우사, 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슈만, 음악세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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